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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자치부 소셜미디어 기자단/소셜미디어 기자단 생생현장

1300년 만의 귀향, '왕오천축국전'을 만나고 오던날

1300년 만의 귀향, '왕오천축국전'을 만나고 오던날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 승려 혜초(704~780년경)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지난 1908년 중국 둔황의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되어 프랑스로 넘어간 이래 지금까지 한 차례도 공개되거나, 전시한 적이 없었던 '왕오천축국전' 입니다.

 

혜초가 727년에 이 글을 완성했고 2010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왔으니 1283년 만의 짧은 귀향인 셈인데요. 

'왕오천축국전'은 아쉽게도 2011년 3월 17일에 그 원본은 프랑스로 보내졌으나, '실크로드와 둔황'이라는 이름으로  2011년 4월 3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우리들에게 선을 보였던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전시였습니다.

 

성인은 1만원, 중고생은 9000원, 유아는 5000원이라는 학생들에게는 약간은 부담이 가는 관람료였지만, 그 입장료가 전혀 아깝다는 생각을 할 수 없을정도로 1300년의 소중한 역사탐험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723~727년 다섯 천축국(인도의 옛 이름)과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등 서역지방을 기행하고 쓴 여행기입니다. 신라의 수도 경주를 출발해 뱃길로 중국 광저우를 거쳐 인도에 도착한 뒤 육로로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지나 당의 수도 장안(지금의 시안)까지 2만 km를 여행했으며 그 4년의 대장정의 기록이 '왕오천축국전'인 것입니다.

 

8세기 혜초가 여행했던 길을 따라 파미르고원 동쪽의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형식으로 꾸며졌습니다.

1부 '실크로드의 도시들'

2부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

3부 '둔황과 왕오천축국전'

4부 '길은 동쪽으로 이어진다'

 

 

기획전시실에 들어가기전,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이 동심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참...이쁘다. '실크로드와 둔황'전 그림이 계단에 그려져 있다. 계단 위 뛰어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상쾌합니다.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 '실크로드와 둔황'을 보기 위해 입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출발하여 중국과 인도를 거쳐서 터키까지 간다는 실크로드의 탐험이 시작됩니다.

 

 

'실크로드와 둔황'전에 출품한 기관들이 명시되어있습니다.

 

 

실크로드의 사람들을 유심히 둘러봤습니다. 그들의 생활풍습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그 역사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동서 문명의 교류의 길이었던 실크로드입니다.

사막과 험준한 산을 넘어 도시와 도시로 이어지는 이 길에 과거의 흔적과 현대의 문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실크로드란?

 

실크로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레디난트 리히트호펜이었습니다. 그는 비단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고원 서쪽 지역과 서북 인도로 수출된 사실에 주목해 이 루트를 실크로드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분야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실크로드라는 개념은 점점 더 확장되었습니다. 요즘엔 동쪽으로 장안(지금의 시안)에 그치지 않고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까지, 나아가 일본의 나라 지역까지도 실크로드에 포함시킵니다.

 

흔히 실크로드라고 하면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길, 오아시스 루트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연구 성과의 축적에 따라 좀 더 넓은 의미로 바라보면,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오아시스지대를 거쳐 이스탄불과 로마에 이르는 무역루트 전체를 일컫는다. 유라시아 대륙 북방의 초원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스텝루트(초원의 길), 남방의 아라비아해 인도양 동남아시아를 우회하여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의 바닷길도 실크로드에 포함됩니다.

 

실크로드는 결국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동서 문명 교류의 젖줄로 이해하면 좋습니다. 초원길, 오아시스길, 바닷길 등을 모두 포함합니다. 이 가운데 동서 문물 교류에서 가장 핵심적인 루트는 오아시스의 길이었습니다. (문헌 참고: 동아일보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가 다녀온 여행경로를 보면서 비단길, 바닷길, 초원길, 그리고 오아시스길을 가늠해봅니다.

 

혜초와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글이 실려있습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사막을 횡단해야 하는 경우에 등에 봉이 둘이 있는 낙타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러한 낙타를 '삼채낙타'라 하는데,

둥에 봉이 둘인 낙타는 아시아 내륙(고비사막이나 몽골달타이)에서 만날 수 있으며 등에 봉이 하나인 낙타는 아프리카대륙이나 아라비아반도에서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다보면, 서역북도에서 만날 수 있는 경교석비, 태양무늬 조각편(나무), 보살두상,공양인두상이나 사슴문양비단, 남자 여자 돼지 나무인형을 만날 수 있었으며 서역남도에서 만날 수 있는 건 두마리의 봉황 조각장식, 붉은색 빗 주머니, 사람얼굴상 목각등을 만날 수 있는데 사람얼굴상 목각은 무덤앞의 수호지용도로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던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천산북도의 유물들중에 손잡이가 하나인 채색토기(bc10세기~6세기), 뼈로만든 칼집(전형적인 유목민족의 예술형태),채색토기, 호랑이 문양의 황금장식, 손잡이가 두개인 도자기, 사슴이 서있는 모양의 구리거울등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산북쪽 유목민의 전통에서는 황금사슴이나 짐승얼굴 금반지, 날짐승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동제고리는 차량의 핸들모양과 흡사했습니다. 세 다리가 달린 구리 솥도 만날 수 있었으며, 양과 사슴무늬가 있는 나무통이나 양머리 손잡이 그릇, 고끼리 조련사와 영험한 짐승무늬가 있는 장식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신의 형상이 있는 면직물. 1~4세기 . 나야 출토,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 소장)

 

실크로드의 삶과 문화에서는 비단은 서쪽으로에서 페르시아의 위금기법은 중국으로 전해졌고, '당금'이라 불리는 위금으로 발전하였던것을 알게 됩니다. 중국의 비단은 로마의 금과 같은 무게로 교환이 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날실(한금)은 중국 직조기술로 세로실을 이용하며, 씨실이라 불리는 (위금)은 가로실 기법으로 직조하는것을 말합니다.

 

문명의 흔적은 기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둔황 막고굴 17호굴 장경동 모형 11~12세기, 둔황연구원 소장) 

 

1900년,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굴이다.

 

혜초스님의 서역기행지인 왕오천축국전은 다섯 춘축국을 여행한 기록이다.

둔황은 명사산 기슭의 둔황천불동으로 번영을 상징한다.

왕오천축국전은 펠리오가 가져간 둔황문서 가운데 발견되었던것이다.

 

 (청동마차행렬   기원전 3세기~ 3세기, 간쑤 우웨이 레이타이묘 출토, 간쑤성박물관 소장)

 

그리고 길은 동쪽으로 이어집니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해외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그리고 일상풍습등을 생생히 담고 있습니다. 두루마리 필사본으로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총 227행에 5893자이며 폭 42cm, 총길이 358cm이지만 우리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통해 저 머나먼 과거로의 여행에 확실한 기록이라는 매개체의 흔적을 쫓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의 가치있는 여행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실크로드...

 

실크로드는 문명 교류의 길이었습니다.

혜초스님이 먼저 걸었던 그 길을 통해 문명과 문물이 전해지고 발전하고 사라져갔다는것을 새삼 보고 느꼈습니다.

굳이 2010년에 가보았던 '국제기록문화전시회'의 영향이 아니었어도 '기록'의 의미와 소중함은 언제든, 어느곳에서든 이렇게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기록의 역사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 생각보다 놀랍고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지혜와 멋스런 삶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의 삶도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